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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디에고 마라도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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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를 넘어 세계 최고 축구선수였던 큰 별이 지다.

따뜻한 햇살이 드리우던 1986년 6월의 어느 오후, 멕시코시티 아즈텍 스타디움에서의 그의 모습은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월드컵 8강전이었다. 55분경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진영에서 공을 소유한 채 마치 잉글랜드 수비진이 없는 것처럼 돌파한 뒤 낮게 깔린 강한 슈팅을 골로 연결했다. 이는 그의 역대 골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골은 무득점의 마라도나가 잉글랜드 패널티지역에서 오심에 잘 대처해 주먹으로 공을 쳐서 네트에 넣은지 불과 4분 만에 나온 것이었다. 그는 골을 기록한 뒤, “신의 손과 머리로 만들어 낸 골”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VAR(비디오 판독)이 없었기 때문에 골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는 4년 전 포클랜드(스페인어로는 말비나스)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영국에 패배한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다고 말했다.

이 골들은 11월 25일 향년 6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마라도나의 삶을 요약한다. 신의 재능으로 축복받은 그의 삶은 부와 함께 했지만 항상 투쟁적이었기에 규칙이나 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신문사인 Clarín은 “마라도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주는 기쁨과 부끄러움을 주는 두 거울이다.”고 언급했다.

가정부와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러스트 벨트 교외에 있는 빌라 피오리토의 판잣집에서 자랐다.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 그의 키는 5피트 5인치(약 165cm)에 불과했지만, 다부진 몸과 근육질의 다리는 폭발적인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달릴 때의 가속력, 발에서 떨어지지 않는 공(뺏기지 않는다는 의미), 그리고 본능적인 시야일 것이다.

그의 프로경력은 15살 때 역사적이면서 평범한 클럽인 아르헨티노 주니어스에서 시작되었다. 이 곳에서의 성공은 보카 주니어스, 바르셀로나, 그리고 나폴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명성과 재산은 감당하기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애정을 갈구했다. 프리로더(얻어먹기만 하는 사람)나 갱스터들과 나이트클럽을 다니면서 코카인에 중독됐다. 많은 여자들을 만났는데 그 중 일부에게는 폭력을 행사했고, 축구팀을 꾸리기에 충분한 마라도나 주니어들이 태어났다.

마라도나 인생의 후반부는 비극적이라 말로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비만과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당시 심판들은 선수들에 대한 보호의지가 약했다.), 복귀를 위한 애처로운 시도를 반복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도 실패했다. 자본주의로 부자가 된 그는 반자본주의자인 피델 카스트로와 우고 챠베스와의 우정에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라도나가 그의 동포인 리오넬 메시 혹은 브라질의 펠레에 앞서는 역대 최고의 선수였는지는 다툴 필요가 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미천한 집안에서 과라니족의 피와 어두운 곱슬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pibe de oro(황금빛 소년) 그 자체였다. “당신은 우리를 엄청나게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즈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사흘간의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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